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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이 되면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조병화(趙炳華,1921.5.2 - 2003.3.8)
한국의 시인
1. 구름에 새긴 시와 시인의 꿈
편운(片雲) 조병화 시인을 모시고, 시인의 고향 난실리로 가는 날은 유난히 아침 해볕이 좋았다. 혜화동 로타리 시인의 집필실에 도착하니 약속시간 5분 전인데도 시인은 예의 검은 베레모와 베이지색 버버리 차림의 환한 미소로 반겨 주셨다.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 어디 아픈데 없으면'어머니,고맙소' 하고, 우리 동네 가서는 '어머니, 저 좀 어서 데려가' 하지. 오늘도 다 어머니가 좋은 사람들 만나 데리고 오라고, 날씨까지 좋게 해주신 거야." 유쾌한 말씀으로 차안은 마치 소풍 가는 것처럼 훈훈해졌다.
"나의 시는 어머니를 찾아온 길이야. 어머니가 내 꿈이요, 내 철학의 하이마트요, 내 예술의 본향이지 육체도 고향의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고 내 영혼도 어머니의 하늘로 찾아 올라갈 거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강의를 할 때에도 어려운 것도 쉽게 말한다던가? 시인의 말씀에는 한 마디의 어려운 말을 섞지 않으면서도 시인께서 즐기는 잎담배처럼 그욱한 향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 존재의 숙소에는 늘 어머니께서 안방을 차지하고 있지, 어머니와 나는 늘 직선 거리이거든 살아 계셨을 때나, 돌아가신 후에나 마찬가지로 직선 거리야, 그래서 내가 흔들리지 않고 살아왔지, 내가 좋아한 시, 럭비, 수학 모두 직선이야, 나는 직선만 살아왔어."
어머니 이야기는 어느덧 헤르만 헤세의「지와 사랑」으로 옮겨졌다. 차안에서 노시인으로부터 명작 강의를 다시 듣게 되다니, 우리는 영악한 학생답게 질문 한 마디씩 만을 던지면서 명쾌한 강의는 쉬임없이 지속되었다. 나르치스에게 오랜 방황에서 돌아온 골드문트가 한 말, '험하고 고독한 세월 내가 발견한 것은 무타인데, 당신은 무엇을 찾았나?'라는 질문에 인생을 이성으로 살아온 나르치스도 순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고 이야기를 마치면서, 내가 찾은 어머니도 골드문트가 찾은 어머니와 같은 거라고 갑자기 눈물을 주루루 흘리셨다.
상대적인 고독이 아니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 고독'과 순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냥 살고 가는 것은 먼지이지, 허무 자체야, 그러나 진실하게, 열심히 살고 가는 것은 절대! 허무가 아니야."
시인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동안 『공존의 이유』에 실렸던 시인의 독특한 「인생」이란 시를 생각해본다.
n
L = ∫후F~ = ▧,ta
0 0< n <100
-「인생」전문(베레모에 파이프 문 그림=후F~)
파이프를 물고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는 시인의 인생(L)을 시간으로 적분하면 관속에 든 시체와 업적(a)이고, 주어진 시간은 100년 을 넘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시이다.
"여기가 송전이야, 저 왼쪽 건물이 송전초등학교이지. 내가 여기까기 걸어서 송전보통학교 1학년을 마쳤어. '게피'나 '십리사탕'을 사먹기도 하면서, 십리를 걸어 다녔지 조금 더 가면 '꿈'이라는 깃발이 팔락팔락하고 있을 거야."
송전저수지를 왼쪽으로 하고 조금 더 달리니 저수지가 끝나는 마을에 이어령 장관 때 지정했다는 '문화마을 난실리'를 알리는 깃발이 펄럭이는 시인의 고향,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이에 이르렀다.
왼쪽으로 포장된 길을 따라 100여미터 들어가니 시인이 직접 펜으로 간결하게 스케치한「닭」(시인은 辛酉생 닭띠)과 「파이프를 문 시인의 옆모습」이 양쪽 기둥에 문패 대신 문장처럼 박혀있다. 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장재봉 아래인데 편운재,청와헌(聽蛙軒), 편운회관 등 아담한 건물 세 채가 자리하고, 그 오른 편으로 가족묘지가 아담하게 꾸며져 있어, 중앙에 시인의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의 산소가 자리하고, 그 오른쪽에 형님의 산소가 있고, 그리고 왼쪽편에 어머니의 산소의 절반 정도 높이로 두 개의 봉분을 만들어 지난 봄에 돌아간 아내 김준을 묻고 하나는 시인 자신의 것으로 예비해 놓았다.
"어머니! 저 왔어요"
모자를 벗고 큰 소리로 시인이 인사하는 어머니 산소 앞에는 아주 낯익은 시가 우리를 반겼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생명을 만드는 쉬임없는 작업/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나 봄이되면/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오,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새로워라/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해마다 봄이 되면-어머님을 생각하며」전문
한국시협상 수상 기념으로 어머니 산소 앞에 시비를 만들어 새겨 드린 이 시는 음악에 있어서의 론도형식과 같다고 할까
편운동산 입구에는 화강암에 '꿈'이라는 시인의 트레이드 마크를 크게 새기고 그 위에「꿈의 귀향」이라는 간명하지만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3행시가 새겨져 있어 잠시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하였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꿈의 귀향」전문
"이건 나 죽으면 제막식만 하면 되도록 준비한 거야. 제자들에게라도 폐 끼치기 싫어, 내가 미리 해놓았어."
뒤면에 '편운 제자 일동'이란 글자까지 새겨 놓은 이유가 명쾌하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30평짜리 목조의 아담한 청와헌(聽蛙軒)은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권옥연의 「입춘대길(入春大吉)」과 일중(一中)의 「청와무욕(聽蛙無欲)」이라는 글씨가 반긴다. 미리 페치카에 장작불을 때어놓아서 따스하였고 두벽이 닿은 남서쪽 코너의 큰 창으로 마을 전경과 송전저수지가 가득 들어왔다.
천정이 높은 목조건물은 서까래를 그대로 살리고, 베른이나 인터라켄 같은 산간지대에서 볼 수 있는 빨간 등을 크리스마스 추리처럼 달은 상들리에를 달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벽면을 가득 메운 시인의 그림들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신비의 안개 그림들을 비롯하여 20호에서 2호에 이르는 크고 작은 풍경화들이 스무점 가까이 전시되어 있었다.
잔디와 납작납작한 검은 돌을 섞어 깔은 편운재 앞뜰에는「먼 세월」「그리움」「사랑」「시는 영혼의 화석」등의 조각들이 알맞은 위치에 서서 고즈넉한 겨울에 젖고 편운재 벽에는 화강암에 「어머니의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 말씀// 살은 죽으면 썩는다// 어머니 陳 遠行心 (1882-1962)을 위하여/ 이 산막을 세움//1963년 한식날//자 조병화
오솔길을 따라 한 80m쯤 걸으니 2층으로 지어진 편운회관(현 조병화문학관)이 나왔다. 편운회관 앞뜰 잔디밭에는 백문기,윤영자,김영학 등의 조각작품과 나무들이 명패를 달고 서 있는데 허영자나무, 조태일나무, 오세영나무, 김재홍나무, 이가림나무, 임헌영나무 등이 눈에 띄었다. 조태일 시인이 경희대학 재학시 고생한 이야기는 수필집에 낱낱이 그려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올린 바 있으나, 대학2학년때 그 사정을 알게된 조병화교수께서 조태일 학생을 총장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게 한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다정다감한 조태일 시인이 제1회 편운문학상을 받고 편운회관 앞뜰에는 늘 푸른 소나무를 심어 스승의 뜻을 기리는 방배동 자신의 집 앞뜰에는 스승이 좋아하는 백목련을 심어 밝은 마음을 다짐한 것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시인의 평생 작업인 48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20여권의 시선집과 시론집,수필집 등 130권에 이르는 저서와 화집,성적표,표창장,훈장,글씨와 그림,조각,기념품 등이 전시된 편운회관 1,2층에는 시인의 일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들로 가득차 있었다.
박세림의「芹香伴水」김소운의 「眞味是淡」월탄의「시는 짓는 것이 아니다 향기 울연히 사람을 취케한다」정비석의「人生不滿百 常懷千歲優(인생은 백세를 채우지 못하는데, 늘 천세의 근심을 품고 사네)」김동리의「自强不息」송지영의「畵如詩 詩如畵」안병욱의「遊於藝」등이 있었다
「조병화대인 혜존」으로 시작하는 김규동 시인의 단정한 붓글씨 편지와「시가 없는 민족은 정신이 없는 민족이며, 정신이 없는 민족은 동물이다. 詩心은 나라의 國心이며, 그 나라의 地心이다」라고 쓴 김용직 교수의 글씨도 눈에 띄었다.
마을 어린이 놀이터 옆에「우리 난실리」라는 시비가 서 있었다.
우리 난실리 고향 사람들은 /잘 살자는 꿈을 먹고 삽니다// 잘 살자는 꿈을 먹고 살기 위하여/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서로 사랑하며/서로 도우며/ 서로 아끼며/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갈/잘 사는 고향 만들기// 우리 난실리 고향 사람들은/ 아름다운 그 꿈을 먹고 삽니다.
-「우리 난실리」전문
뒤로는 야트막한 장재봉이 있고 앞으로는 어비리 저수지가 바라보이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남향 마을인 난실리에는 한양 조씨 마흔 가구 쯤이 모여 살았다. 조병화 시인은 1921년 5월 2일 난실리 322번지에서 지주이며 한학자였던 난유 조두원 옹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 때 아버지는 60세 어머니는 40세에 태어난 늦동이었다. 사람들은 어린 병화손년을 '조도사댁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하였다.
아버지는 소년이 여덟살 때 돌아가시고 상여를 따라가던 수 많은 만장들을 소년의 기억에 남겼다. 십리 떨어진 송전보통학교 1학년을 마친 뒤 종달새 울고 보리 파랗게 돋아나는 어느 봄날 어머니를 따라 40리를 걸어서 오산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 미동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직접적으로 시인이 될 조짐은 없었을까?
"5학년 때 한번은 일본인 담임 선생이 가을에 대하여 글을 지어 오라고 했어 나는「낙엽」이란 제목으로 작문을 제출하여 석달 뒤에 『전국 아동 작품집』에 그 글이 인쇄되어 있는 거야 세상에 처음으로 내 이름과 글이 활자화된 거지 어린 마음에 참으로 기뻤어 글 쓰는 것으로는 그것이 전부구만."
졸업생 대표로 졸업장을 받고 도지사 상을 비롯하여 우등상,개근상,공로상 등을 휩쓸어서 이름이 불리워 일어날 때마다 참석하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미동초등학교 교정에는 지난 96년 5월 1일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탑이 서 있었다. 거기에는「슬기롭게, 참되게, 씩씩하게」라는 교훈과 함께「미동, 그 이름 영원하여라」라는 제목으로 28회 졸업생인 시인의 기념시가 큰 돌에 새겨져 있어, 뛰노는 어린이 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경성사범에 들어가게 된 것도 미동보통학교교장 일본인 이치가와 선생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100명 모집에 일본인 학생 80명 뽑고 나머지 20명을 한국인 학생 중에 선발하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미동초등학교에서 혼자 추천을 받아 담임교사가 황금정(을지로) 끝에 있는 경성사범학교 시험장까지 찾아와서 '너, 자신을 가져라! 꼭 될 터이니." 하고 격려하여 주었다고 한다.
경성사범학교 시절에는 럭비선수로 뽑혀서 전일본대회에 나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로 했는데 운동 후에도 도서관에 가서 밤 늦도록 공부를 하여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또한 좋아하는 미술부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당시 선전에 입선한 4년 선배 이봉상을 따라 야외로 그림을 그러러 다니곤 하였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우리 세대는 고민이 많았지 어느날 밤 기숙사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 있을까 하고 혼자 생각에 잠겼는데 살아서 여행을 많이 하여 자연의 세계를 많이 보고, 책을 많이 읽어 정신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많이 보고 돌아가는 것이라고 영감이 떠오른 거야. 그런데 시간은 유한하여, 정신이 축약되어 있는 시를 읽기 시작했지. 폴 발레리, 말라르메, 릴케, 로망 롤랑, 헤르만 헤세,프랑시스 쟘,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 등을 읽으며 사색과 정감의 하늘을 열어갔어."
그 때에도 시인이 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퀴리부인 같은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밤새워 위인전 등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까지 시를 쓰게 한 밑받침이 되었을 거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후일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자연과 사람의 삶을 관찰한 것도 젊은 날의 꿈을 실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선우휘 학생과 한 반이었던 시인은 졸업하자마자 동경 고등사범 이과에 입학하여 물리 화학을 전공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고 폭격이 심해지자 3학년때 서둘러 귀국하였다. 그리고 경성사범학교를 찾아가 조윤제를 빼놓고는 유일한 한국인 교사였던 신기범 선생을 찾아갔다. 사정 이야기를 들은 신기범 선생은 다카시 교장에게 시인을 데려가서 그 자리에서 내일부터 물리교사로 나오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45년 동경고사 선배의 중매로 의과대학 졸업반에 재학 중인 김준(金埈)을 만나 1주일 만에 약혼을 하고 9월에 결혼식을 하였다. 그 후 인천중학교를 거쳐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시를 쓰게 된다.
"해방이 된 조국은 여러가지 지식인에게 어려움을 주었어 좌우익 싸움에 학교까지 혼란할 때여서 그래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는데 어느날 경성사범학교에서 함께 봉직하며 영어를 가르쳤던 동경제대 출신의 김기림 선생이 슬쩍 보고는 달라고 하여 주었더니 <산호장>이라는 출판사를 장만영 시인을 소개하며 시집을 내라고 하여 얼떨결에 낸 것이 제1시집『버리고 싶은 유산』이지."
며칠 후 김기림 시인이 저녁 초대를 하여 중국집으로 따라 갔더니 장만영, 김광균, 이봉구, 김경린, 양병식 등의 모더니스트들이 모두 모여 축하를 해주었다고 고 한다. "스물다섯 살까지는 시를 읽는 시의 생활이요, 스물다섯 이후에는 시를 쓰는 시의 생활이었지. 시 몇 줄 써서 시인이 되는 게 아니라 시에 평생을 투자하여 시의 생활을 완성해가는 것이 진정한 시인이야."
98년 11월 30일 펴낸 제48숙의 시집 『기다림은 아련히』는 올해들어 두 번째로 펴낸 시집으로 작품 끝에 모두 지은 날짜가 씌어 있어 시인의 시 쓰는 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무더운 8월 한 달 동안 16편의 시를 지었으며, 평균 하루에 2편의 시를 지은 것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시 아래에는 선생님의 상표가 되어 버린 파이프와 꽃과 새와 산,과일,달,가방, 나무,물고기,집 등을 그린 판화가 B.H.Cho,'98라는 사인과 함께 실려 있어,시를 쓰고 흥이 남으면 즐겁게 삽화까지 즐겼음을 짐작하게 한다. 시인은 언제나 강하고 친절하고 부드럽기만 할까?
"나는 실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야. 싫어하는 사람과는 마음에 없는 악수를 하기 싫어 피해 다니기도 하고, 편운재에 개를 길렀다가 자위에 치어 절뚝거리며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다시는 개를 기르지 못하는 것도 마음이 약한 증거이지."
생전에 사회에 나와 누구와 싸워 보지도 못한 것이나 아주 오래 전에 시평을 한 1년 동안 신문에 썼었는데 시인과 그 가족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안타까와 그 후로는 시평을 쓰지 않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조병화 시인은 정력적인 저술활동 뿐만 아니라 맡겨지는 일에도 역량을 발휘하여 경희대학교 교수로 시작하여 문리대학장,음대학장,교육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정년 퇴임 이후에는 인하대학교에서 문과대학장,부총장,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시인협회장, 한국문인협회이사장, 세계시인대회장, 대한민국예술원회장, 세계시인대회 국제이사, 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으로 활동하였다.
도대체 그 무엇이 차령산맥이 지나가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산골소년을 이렇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하였을까?
시인이'나의 작품들을 나의 그 고독한 영혼과의 싸움에서 추려 남은 인생의 오식'이라고 고백한 바 있거니와 그 답을 곧이곧대로 '고독과 허무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고독이 크면 클수록 허무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것을 극복해가는 노력도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젊은 날 사랑에 가슴 태우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애송하였던 시「소라」에는 이런 고독을 견디는 힘이 담겨 있다.
바다엔/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허무한 희망에/몹씨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면시/물 속이 그립답니다//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소리/저만이 외롭답니다.
-「소라」전문
시인이 직접 가르쳐 길러낸 문인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나 대표적인 수제자들을 보면 서울고등학교 시절의 황동규, 마종기, 김광규, 중앙대학교 시절의 박성룡, 경희대학교 시절의 조태일,박정만, 전상국,박이도,이성부, 신봉승,박남철,정호승 등이다.
「멋생(生) 멋사(死) 선생님」이라는 제목의 김혜숙 시인의 글에는 '이분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인생을 사랑하며, 철저하게 고독하면,슬픔을 아름다움으로 끌어오릴 수 있는 분이구나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곤했다. 고독과 슬픔과 허무, 이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 가까운 곳으로 바싹 불러 들여서 그들과 아주 친숙한 사이가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이제는 그분의 작품에서 빛나고 영광스런 훈장이 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라고 쓰고는 세계시인대회장으로서 큰 대회를 역시 멋지게 치뤄내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지나칠 정도로 정직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꼭 지키고 부자연스러움을 못 견디시며,치밀하면서도 매사에 임하는 조심성과 속결주의에 탄복하고 있다.
서울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인의 제자인 소설가 김용운의 글은 더욱 간절하다.
시뿐 아니라 그림도 학창시절엔 럭비선수였다는 국어와 작문뿐만 아니라 물리,화학,수학 시간의 보강까지도 척척 맡으시던, 보다 넓고 보다 멀고, 보다 멋지고 ,보다 깊은 인생을 보는 눈을 만들어 주시느라고 애쓰시던 ...선생님을 처음 뵌 후로 어언 30년이 흘러 갓다. 돌이켜 보면 멋있는 분이셨다. 외로우면 웃으셨고,괴로우면 더욱 크게 고독할 땐 늘 노래 부르셨던 당신 그리고 당신은 영원한 청춘이셨다. 당신 자신은 물론,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그렇게...
김대규 시인이 문예지에 시 「조병화 1」에 게재되어 소개한다. 김시인은 조병화 시인이 연세대에 출강할 때부터의 30년 제자로서 조병화 연작시 3.40편을 썼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좋다//조물주의 낙서같은 펜화나/다 드러내 놓지 않고/ 조금씩만 보여주는 유화나/그의 그림이 좋다/ 그가 아무리 많은 시집을 내도/ '조병화' 라는 큰책 한 권에 당하랴.
-김대규의 「조병화 1」전문
"시가 내 인생의 철학이었다면, 그림은 나의 위안이었지."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 그래도 만약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후배들에게 한 말씀,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등의 질문에 즉각즉각 대답해 주셨다.
"30여 나라 중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을 들라면 역시 스위스와 모로코야. 후회는 전혀 없어.시간을 아껴서 무엇을 하건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흔들리지 않는 자기 인생을 살라고 하고 싶어. 소식(小食)하고,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거지.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살면 머리가 맑지.규칙에 어긋나면 머리가 흐려지는 게야."
아들 진형이 재정학 박사로 삼성선물(주)의 사장으로 재직 중이며, 큰딸 원은 어머니를 이어 의사로서 미국에 있고, 바이올린을 하는 둘째 딸 양과 그림을 전공하여 지난 봄에 시인과 함께「시와 그림전」을 가졌던 막내딸 영이 서울에 살고 있다.
<편운문학상>을 제정한 것도 공부를 하는데 학비 들은 일이 없어 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어서였다고 말한다. 문협이사장을 하면서 1억원의 기금을 조성한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지만 시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맡든지 간에 늘 거기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추진하고 성취하여 베푸는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이 땅의 역사를 이어갈 다음 세대를 위하여 시인은 명쾌한 깨달음을 정립, 이미 오래전에 노래로 읊은 바 있다.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의자 7」전문
편운제를 둘러보고 시인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선머슴 저고리 고름처럼 짧은 겨울해가 저물고 있었다. 모두들 어디론가 서서히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처럼, 서울이 쓸쓸해지고 있었다. 이 땅에 이만한 시인 한 분 계셨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일인데 언젠가 떠날 일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무리 여한없이 사신 분이라도 하더라도 떠나신 것은 슬픈일이다. 너그럽고 축복받은 시인을 통하여 오래도록 사셔서 부족한 우리와 후생들과 함께하며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 되어 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함을 뒤로 하고 훨훨 먼길을 떠나신 것이다.
2. 주요작품
사랑/ 고요한 귀향/ 차창/ 인생/ 무지개/노래를 불러도 소리를 잃은 피리/ 타향에 핀 작은 들꽃/긴 회고/ 존재 그순간/지금은 제귀 깊은 곳에/나 돌아간 흔적/초상/소라/의자/해마다 봄이되면 등 다수
3. 주요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 인간고도(1954)/사랑이 가기 전에(1965)/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1955)/ 밤의 이야기(1961)/ 내일 어느 자리에서(1965)/
가을은 남은 거에(1966)/ 내 고향 먼 곳에(1969)/ 오산 인터체인지(1971)/ 어머니(1973)/ 안개로 가는 길(1981)/어두운 밤에도 별은 떠서(1985)/해가 뜨고 해가 지고(1985)/타향에 핀 작은 들꽃(1992)/ 다는 갈 수 없는 세월(1992)/ 내일로 가는 밤길에서(1994)/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1997)/ 황혼의 노래(1997)
기다림은 아련히(1998)/ 따뜻한 슬픔(1999)/ 고요한 귀향(2000)/남은 세월의 이삭(2002)/ 사랑이 그러하듯이(2003) 등 52권의 시집 포함 160여권의 저서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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