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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趙炳華)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여행에서 살고 있다. 내면에서 외면에서, 정신에서 자연에서 그 여행을 살고 있다.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이 자리까지 실로 많은 여행을 살아왔다. 때로는 허무를, 때로는 불안한 희열을, 그리고 지구를 빙빙 돌며 때로는 사막을, 때로는 도피를, 때로는 초기를, 때로는 절망을, 때로는 좌절을, 때로는 정글을, 때로는 평야를, 때로는 산악을, 때로는 하천을, 때로는 바다와 섬을, 깨로는 대도시를, 때로는 하잘 것 없는 작은 시골 마을.
인간은 누구나 두 가지 여행을 동시에 하고 있는 거다. 유구한, 실로 유구한 여행인 거다. 이러한 양면의 여행을 살아오면서 나는 항상 나와 그 동행을 생각해 왔다.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건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걸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오면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술 하세
------시집 <공존의 이유> 속에서 ‘제2장’
여행엔 동행이 필요하다. 아무리 고독을 사랑하고, 혼자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혼자는 살지 못하다. 같이 살게 마련이다. 그런데 동행이 문제다. 좋은 동행을 만나게 되면 좋은 여행, 좋은 인생이 될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게 될 거다. 실로 세상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이 어려운 일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그 이별같이 아픈 일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세상엔 좋은 동행만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생전을 줄곧 한 마음 한 뜻으로 동행하는 사람이 그리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많을 거다. 세상은 서로 각자의 욕심을 사는 거니까. 이해 관계를 넘어서까지 손을 잡는 동행이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배신이 있다. 배신이야말로 무서운 손실이다. 작별이 있다. 작별이야말로 허망한 고독이다. 이러한 손실, 희망을 미리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인간은 그리 깊이 사귀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변하는 거니까. 상대고 나도, 동행도 변하는 거니까. 이 세상 변하지 않는 거란 ‘시간’뿐이다. 이 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우리 인간들은 한때 살다 변하고 변해서 죽음으로 마지막 변해 버리는 거다. 다음과 같이 절교를 쓴 시가 있다.
자 그럼
자네는 이리로
나는 이리로
감세.
때때로 생각나걸랑 그저 그런거지
함세
먼저 가게나
난 쉬어서 담배 한 대 피우겠네
날랑 잊어 주게
되도록이면 지금대로 자네만 생각하게
남이 떠난 길
아예 참견 다시 말게
하늘에 닿을 리 없이 닿아 있는
마냥 이 路上
지나가는 거 이른바 인생
고운 빛바람이구려
해와 별이 路上에서 지고 뜨는
이 하이웨이
말이 모두 침묵이로다
이 모양 같은 행인 다시 없겠네만
만났다. 하더라도 서로 떨어진 자리
끝 있는 거로 끝 없는 길 갈 뿐일세
자! 그럼
시집 <가을은 남은 거에> 속에서 ‘기로’
실로 사람의 목숨은 ‘끝 있는 거’ 유한한 거다. 그 유한한 목숨으로 ‘끝 없는 거’ 그 내일을 향해 가다가 목숨 떨어지면 그뿐 그걸 사는 거다. 거기까지 여행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크게 문제되는 건 정신의 여행이다. 마음의 여행이다.
영혼의 여행이다.
영국의 한 시인은 ‘시는 종교에 이르는 중도의 집’ (F.W. Robertson 1874 ~ ?)이라고 말했지만 이 엄청난 정신 여행 속에서 생각하는 인간은 그 생각만큼 넓게, 깊게, 멀게, 가치 있는 빛을 여행하다가 가는 거다.
생각이 없는 인간에겐 오로지 땅과 죽음이 있을 뿐, 정신의 여행이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여행은 나의 철학이며, 그 종교가 나의 삶 전부다. 지구는 많이 돌아다녔다. 그리 미련이 없다. 남은 건 정신의 여행 그 탐험, 영혼의 푸른 목장을 찾아서 먼지와 바람, 이 현실을 뚫고 있는 거다.
‘태양에서 나의 태양으로 돌아가는’ (S.Spender, 1909 ~ ) 이 적막한 여행에서
歸鄕風景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식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 새 이곳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시집 <오산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가 생기고 고속도로 선상에서 작별을 하는 현대의 이별 풍경이다. 이렇게 우린 지금 고속시대에 살고 있는 거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생명, 그 목숨은 고속시대, 고속도로에 뜬 먼지, 터무니 없는 이 허탈감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옛날의 시간이나 지금의 시간이나 그 질과 양에 있어서 하나 다를 것이 없겠지만 지금의 시간은 왜 그리 빠른지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고속화하여 그 시간의 질과 양이 그만큼 희박해진 것 같은 허전함을 어지 할 수 없다.
나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명 난실리다. 지금 이곳으로 내려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보통 오산을 돌아 용인 땅을 건너 송전 저수지가로 해서 들어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사방 고속도로가 뚫어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원동 인터체인지에서 동으로 돌아 다시 용인 인터체인지를 돌아 남하하여 약 30리 송전으로 해서 들어가도 되고, 신갈 인터체인지를 동으로 돌아 구길을 동으로 가다가 용인에서 돌아 약 30리 송정으로 해서 들어가도 되고, 평택 인터체인지에서 동으로 돌아 안성으로 해서 양성을 거쳐 약 30리 동북으로 들어가도 된다. 또 그 길로 경기도 광주로 해서 남하, 용인을 거쳐 들어가도 된다. 서울서 약 백칠십 리, 진위천 상해 계곡에 나의 고양 그 난실리는 있다.
나는 이곳을 아홉 살 되던 해 봄에 떠났지만 그때만 해도 자동차가 신기한 아주 산골 마을, 서울에 올라오려면 오산까지 40리 걸어 나와야 했다. 사실 난 아홉 살 때 처음 이곳 오산서 기차라는 걸 보았다. 지금 이곳 내 고향까지 직행하는 차로 약 한 시간 30분, 더 빨리 달리면 한 시간 10분이면 간다. 아직 전깃불 없는 캄캄한 시골, 그러나 저수지가 넓은 호면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한적한 농촌, 대개 주말을 나는 이곳에서 흙과 남폿불 고향 사람들과 보낸다. 나도 죽으면 이곳에 묻히지 하는 생각으로 몇 년 전 어머님 묘소 옆에 평운재라는 산막을 지은 일이 있다.
그로부터 이곳을 왕래하며 이 세상 떠나는 연습을 나대로 하고 있는 거다. 위에 들은 시도 이러한 ‘떠나는 철학’이 그 알맹이로 되어 있는 거다. 고속시대, 고속도로에서 고속버스를 같이 탄 동행들하고 작별을 하는 풍경, 나는 40리밖에 남지 않은 생명이다. 그들 젊은 연대는 남으로 천리를 달리는 생생한 생명, 이 엄청남 하이웨이에서 이제 나는 다듬으며 다듬으며 잊을 거 잊고, 남은 거 챙겨 추리며 40리 동으로의 이 혼잣길, 그 길로 접어드는 거다. 작별을 하면 그뿐 말도 소용이 없는 이 적막, 참으로 세상은 먼지다.
먼지같이 떠 있다가 먼지같이 사라지는 이 존재의 명멸, 그걸 살며 난 왜 이렇게도 눈물이 많았던가. 소유하고 싶어도 그 소유를 버리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그걸 근심 속에서 버리고, 반가운 일 있어도 그걸 반쯤 눌러서 버리고 기쁜 거, 쓸쓸한 거 거품 속에 혼자 안고 모두 버리며 살아온 내 철학, 항상 머리 속에 감돌고 있는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남은 나를 버릴 건가, 하는 거다. 사실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이다.
이 숙명이 항상 나를 풀어 놓지 않고 있는 거다. 이 숙명 속에서 얼마나 많은 순응과 항거를 해 왔던가.
We look before and after
And pine for what is not ;
Our sincerest laughter
With some pain is fraught
Our sweetest songs are these that tell of saddest thought
종달새의 시인 영국의 셀러가 읊었던 이 시를 위안 삼아 나의 학창생활은 다채로운 꿈과 방탕 그 고독을 안으로 살아 빠져왔던 거다. 그러나 지금 성인이 되고 나에게 배정된 인생 삼분지 이를 상고 있으면서도 가라앉지 않는 이 겉도는 철학,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 있어 더 강한 실존의식인지도 모른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야 하는 일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떠나야 하는 일’ ‘돌아가야 하는 일’ 이걸 생각하면서 그럼 어디로 떠나고 어디로 돌아가는 건가. 그걸 생각하면서 많은 걸 이리고 저리고 뚫어보며 마음 탁 넣지 못하고 산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돌아가야 할 두 가지 고향을 지니고 있는 거다.
하나는 지리적인 고향이며, 또 하나는 영혼의 고향이다. 나의 지리적인 고향은 식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삭아가는 자연, 난실리이다.
그러나 나의 영혼적인 고향은 어디라 아직 말할 수가 없다.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언어의 협조로 그 고향의 소재를 더듬어 가고 있는 거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숙소’라 했지만 나는 숙소를 수없이 유랑하여 돌아가야 할 내 영혼의 고향을 찾고 있는 거다. 시라는 이 중도의 집에 묵으면서 나머지 동으로 40리 목숨, 나는 지금 그걸 마지막 노비로 나의 고향 길에 접어 들고 있는 것이다.
적막(寂寞)을 오히려 벗삼아.
도서출판 청화 인생 파라다이스 6권 철학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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