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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전문월간지 유심 2015년 5월호에 실린 특집 <잊지 못할 내 시의 스승>에서 박주택 시인의 글입니다.
그리운 혜화동 로터리
박주택
고등학교 3학년 때 대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내린 것은 1977년 봄이었다. 기억이 둔감하여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경희대학교에 도착한 것은 134번 시내버스 덕분이었다. 학장실의 방을 노크하고 들어가니 선생께서 안경 너머로 보이는 교복 입은 학생이 의아하신지 앉아 계신 자세를 고치며 웬일인지를 물어오셨다.
문예 특기생 공모 원고를 제출하러 왔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앉으라는 말씀과 함께, 대전에서 왔다면 누구 시인을 아느냐, 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느냐 등을 물어 오셨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책이며 유화 그림이 걸려 있는 하얀 벽이며 교과서에 <의자>라는 시를 쓰신 분의 말씀마다에 혼몽했던 기억이 이사라하다.
대학 3학년 때 시 몇 편을 들고 학장실을 찾았을 때 선생은 다시 물어 오셨다. 이게 무슨 내용이냐. 장시 <파행(爬行)>과 <저택>이라는 시였을 것이다. 장시를 죽 훑어 보시더니 기회 있으면 뽑아주마 하셨다. 학장실 입구 벽에 나의 졸시(拙詩)가 붙어 있었던 것도 그즈음. 축구 시합 때 헛발질한 것이 용케 골 안으로 들어간 것을 스탠드에 앉아 계시던 선생께서 박수를 보내셨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내가 교수가 되기까지 선생은 아낌없는 지원을 하셨다. 시인으로 성공하려면 외골수가 되어 고독과 함께해야 한다며 늘 시집을 읽고 시를 가까이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추천서를 써주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 박사학위 눈문을 책으로 묶어 드렸을 때는 편운문학 평론상까지 주셨다. 시상식장에서 환히 웃으시며 어깨를 두드리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받기만 했을 뿐 보답해드리지 못한 것이 그저 죄스럽기만 할 뿐이다.
시인들과 함께 여행 가는 버스. 선생께서 맨 앞에 앉아 계셨다. 휴게소에 들렀을 때 쉬다 보니 몇 분을 늦었다. 버스에 승차하려고 발을 올리는 순간 선생의 불호령이 떨어지셨다. "시간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약속에 둔감했던 그때 이후, 시간에 관한 한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썼다.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사람 사이의 말에 대한 약속도 한 치의 어김을 용서하지 않으셨다. 선생의 가르침은 유전한다. 언젠가 제자들이 내 생일이랍시고 꽃과 케이크를 들고 늦게 나타난 것을 다시 돌려보낸 것도 선생의 유산 때문이었다.
혜화동 로터리 다방, 대학로 카페 그리고 혜화동 파출소 옆 2층 선생의 집필실에서 선생을 자주 뵈었다. 김수영을 명동에서 만나 부르주아라고 욕해주던 일, 시는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쓰는 것이라며 집필실 책저미 속에서 들어보라고 읽어주시던 일, 비평에 대해 적의를 드러내며 고량주를 들이키시던 일이 떠오른다. 혜화동 자택 담요에 무릎을 감싸 안고 계시던 마지막 모습도 떠오른다.
책장에는 언제나 선생이 주신 '꿈'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조그마한 접시가 놓여 있다. 그리고 선생께 조르다시피 받은 선생의 붓글씨 두어 점이 있다. 길을 열어주시는 지혜의 말씀과 은덕들이 있다. 언젠가 안성 편운재 묘소를 찾아뵙고 내료오는 길, 철쭉이 하얀 벚꽃을 향해 피어 있었다. 거대한 영욕의 시인이 손을 흔들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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